
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서울 북촌의 봄은 때때로 전시보다 먼저 온다. 골목을 타고 번지는 꽃기운과 고즈넉한 한옥의 결 사이로, 한 시대를 통과한 도자의 시간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 종로구 북촌의 갤러리단정(대표 이영란)에서 열리는 '청화, 절제와 여백의 언약'은 한국 현대 도예 1세대를 대표하는 고(故) 이세용의 유작과, 그의 예술세계를 곁에서 함께 지켜온 최월규 작가의 생활 자기를 한 자리에서 조망하는 전시다.
이번 전시는 지난 1월 서울에서 처음 마련된 이세용 회고전의 연장선에 놓인다. 그러나 단순한 앙코르 전시는 아니다. 오히려 이번 전시는 한 작가의 예술세계를 추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미감과 정신이 오늘의 생활 도자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이세용의 청화는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절제와 여백, 그리고 삶의 품격을 말하는 조형 언어로 읽힌다.
이세용은 한국 현대 도예의 흐름에서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작가다. 경희대학교 도예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국립요업기술원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전통 도자의 기술적 기반과 현대적 조형 감각을 동시에 다져온 그는, 백자토와 청화, 진사, 금채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통해 도자와 회화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었다. 그가 남긴 작업은 그릇과 오브제, 회화와 도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한국 도예가 지닌 전통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증명해왔다.
무엇보다 이세용 작업의 핵심은 ‘회화적인 도자’에 있다. 민화에서 길어 올린 동식물의 상징, 서양 회화의 자유로운 필치, 도시와 문명에 대한 은유적 시선이 그의 도자 표면 위에서 한 화면처럼 펼쳐진다. 도자는 더 이상 기능적 공예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서사와 감각을 담는 회화적 장(場)이 된다. 청화의 푸른 선은 단정하면서도 깊고, 때로는 유희적이며, 때로는 도시적 고독을 머금는다. 그것은 장식이 아니라 사유의 흔적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그러한 이세용의 예술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모란과 컴퓨터, 도시의 이미지가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하는 ‘경계’는 고도화된 문명 속에서 점점 밀려나는 자연과 인간의 자리를 성찰하는 작품이다. 유럽의 풍경을 청화백자 위에 옮긴 ‘건물과 다리’는 여행의 시선과 도자의 표면이 만나 만들어내는 낯선 서정의 결과물이며, 도시를 배회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은유한 초기작 ‘K선생’은 이세용 작업이 일찍부터 사회적 감수성과 인간적 서사를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작품은 한 개인의 예술적 이력인 동시에, 한국 현대 도예가 공예에서 조형예술로 외연을 넓혀온 역사와도 겹쳐 읽힌다.
그의 작업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한국의 현대 공예전’에는 한국 현대 공예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대거 소개됐으며, 이세용 역시 그 맥락 안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이는 이세용의 도예가 단지 한 시대의 양식이 아니라, 오늘의 공예 담론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조형 언어임을 방증한다.
이번 전시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이세용의 예술혼이 단절된 기억으로 남지 않고 현재의 생활 도자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준다는 데 있다. 전시에는 여주에 자리한 이세용도예연구소를 중심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최월규 작가의 생활 자기도 함께 소개된다.
최월규의 작업은 이세용의 조형적 세계와는 또 다른 결을 지닌다. 만약 이세용의 청화가 화면과 서사의 확장이라면, 최월규의 그릇은 생활의 시간과 식탁의 미학을 품는다. 팔절직사각합, 원형합 등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생활 자기는 단아하고 절제된 형태 속에 오랜 상차림의 경험과 손맛의 기억이 스며 있다. 그것은 단순히 ‘예쁜 그릇’이 아니라, 무엇을 담고 누구와 나누며 어떤 시간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최월규 작가는 매년 4월 여주 작업실에서 ‘오픈스튜디오’를 열고, 차와 음식, 그릇과 대화를 함께 나누는 ‘맛있는 그릇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다. 2010년부터 지속돼온 이 행사는 도자를 감상의 대상으로만 두지 않고, 실제 삶 속에서 향유하는 문화로 확장해온 자리였다. 이번 북촌 전시는 그 여주의 시간을 서울 도심으로 옮겨놓은 셈이다. 공예가 미술관의 진열장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밥상과 찻자리, 일상의 관계 맺기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관객은 보다 가까이서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전시 취지는 관람객 참여 프로그램에서도 이어진다. 전시 기간 중 열리는 ‘맛있는 그릇 플레이팅’ 이벤트는 최월규 작가가 직접 만든 그릇을 활용해 음식 세팅과 플레이팅을 배우는 프로그램으로, 작가와 관람객이 보다 밀도 있게 만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도자는 결국 쓰임을 통해 완성된다는 공예의 본질을, 이 행사는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감상에서 사용으로, 전시장에서 식탁으로 이어지는 이 경험은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핵심이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한 작가의 유작전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계승’에 관한 이야기다. 많은 유작전이 과거를 기념하는 데 머문다면, ‘청화, 절제와 여백의 언약’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세용의 예술이 어떤 미학적 유산을 남겼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의 공예와 생활문화 안에서 어떻게 호흡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청화의 푸른 빛은 단지 아름다운 색이 아니라, 세월과 손길, 사유와 생활을 이어주는 하나의 언약처럼 다가온다.
한편 북촌의 봄 한복판에서 만나는 이 전시는, 결국 우리에게 묻는다. 예술은 무엇을 남기는가. 그리고 그 남겨진 것은 어떻게 다시 오늘의 삶 속으로 돌아오는가.
이번 전시는 그 질문에 대해, 맑고 푸른 도자의 언어로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답을 건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