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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 한불 수교 140주년, '한국 현대판화의 시간을 새기다'

인당뮤지엄, 한불 수교 14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개최... 한국 현대판화의 시간을 걷다

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판을 새기는 일은 시간을 새기는 일과 닮아 있다. 나무 위에 칼을 대고 선을 파내는 순간, 그 자리는 되돌릴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흔적 위에 잉크를 올리고 종이를 눌러 찍는 행위는, 지나간 시간을 다시 현재로 호출하는 일이다. 디지털 이미지가 무한 복제되는 시대에, 이러한 느린 노동의 예술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존재의 밀도를 드러낸다.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관장 김정)이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특별기획전 '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는 바로 이 '시간의 밀도'를 되묻는 자리다. 4월 1일부터 5월 23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판화의 흐름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며, 동시에 국제 미술계와의 접점을 확장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다.

 

판화는 오랫동안 '복제'의 예술로 오해받아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나무를 깎고, 판을 만들고, 잉크를 올리고, 다시 찍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단순한 기술적 반복이 아니라, 시간과 노동, 그리고 사유가 축적되는 예술적 행위다.

 

이번 전시는 '일상', '역사', '서정', '도시'라는 네 개의 축을 통해 한국 판화가 어떻게 삶의 풍경과 시대의 기억을 담아왔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일상, 나무와 칼' 섹션은 판화의 가장 근원적인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김성수, 이윤엽, 주정이의 작업은 나무와 칼이라는 원초적 도구를 통해 이미지가 탄생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특히 나무의 결을 따라 새겨지는 선들은 작가의 의지와 물질의 저항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되며, 이는 판화가 지닌 물질적 긴장과 생명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어지는 '역사,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는 이성자, 김우조, 류연복, 김억의 작품이 중심을 이룬다. 이들의 작업은 개인의 경험을 넘어 한국 사회의 역사적 시간과 집단적 기억을 담아낸다. 특히 김우조의 1970년대 흑백 목판화는 거칠고 절제된 선을 통해 시대의 긴장과 현실의 무게를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판 위에 새겨진 선들은 단순한 조형 요소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언어로 기능한다.

전시의 중반부는 한국 판화가 지닌 정서적 깊이를 조명한다. '서정, 시처럼 바람처럼' 섹션에서 정현과 안정민의 작업은 자연과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현은 에디션이 없는 유일판 목판과 카보런덤 기법을 활용한 알루미늄판 작업을 통해 판화의 개념 자체를 확장한다. 반복 가능한 이미지라는 판화의 전통적 정의를 벗어나, 단 하나의 이미지로 존재하는 작업은 매체의 경계를 질문한다.

 

마지막 '도시, 여기 지금'에서는 이언정, 정승원, 김서울이 동시대 도시의 풍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다. 이들의 작업은 익숙한 도시 공간을 낯설게 전환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감각을 판화라는 매체 안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대구 출신의 젊은 작가 김서울은 지역성과 동시대성을 교차시키며 한국 판화의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축은 국제 협력에 있다. 프랑스 그라블린미술관(Musée du dessin et de l’estampe originale)과의 공동 기획으로 이루어진 이번 프로젝트는 단일 전시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인당뮤지엄에서 시작된 전시는 오는 6월 28일부터 11월 8일까지 프랑스에서 열리는 'K Prints, Korean Woodblocks'로 확장된다. 김우조, 김서울, 주정이, 이윤엽, 류연복의 작품이 프랑스 무대에 소개되며, 한국 판화의 미학과 역사적 깊이를 국제적으로 공유하게 된다.

 

특히 '대구 판화'의 계보가 해외에서 조명된다는 점은 이번 전시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다. 지역에서 출발한 예술적 흐름이 세계 미술계와 연결되는 순간, 판화는 더 이상 지역적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 언어로 확장된다.

 

오늘날 이미지 생산은 극도로 가속화되어 있다. 클릭 한 번으로 생성되고 소비되는 이미지들은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진다. 이러한 시대에 판화는 정반대의 시간을 살아간다.

 

판을 새기고, 잉크를 올리고, 종이를 눌러 찍는 과정은 물리적 시간과 반복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작가는 사유를 축적하고, 이미지는 점차 깊이를 획득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130여 점의 작품, 판화 110여 점, 목조각, 목판 및 유물 자료는 이러한 '느린 시간'의 집적이다. 전통적인 목판화에서부터 설치와 실험적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도는 판화가 단순한 장르가 아니라 확장된 예술적 플랫폼임을 보여준다.

전시 제목 '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는 자연의 순환을 은유한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불어 꽃잎이 흩어지고, 다시 새순이 돋아나는 과정은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재생의 흐름을 담고 있다.

 

한국 판화 역시 이러한 순환 속에서 진화해왔다. 전통적인 목판화에서 출발해 현대적 실험으로 확장되기까지, 판화는 시대의 변화에 응답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왔다.

 

한편 인당뮤지엄 김정 관장은 "판화는 단순한 복제 기술이 아니라 나무와 칼, 시간과 노동을 통해 삶과 시대를 새겨 넣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판화는 이미지 이전에 하나의 태도이며,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다.

 

이번 전시는 그 태도를 다시 묻는다.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꽃이 피고 바람이 불 듯, 예술 역시 흐른다. 그러나 어떤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판 위에 새겨진 선처럼, 그 흔적은 오래도록 남아 우리를 다시 그 자리로 불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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