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제주 해녀의 삶을 '개인의 직업'이 아닌 '가문의 생애사'로 확장해 보여주는 새로운 사진 프로젝트가 막을 올렸다. 사진가 양종훈(상명대학교 대학원 디지털 이미지)교수와 사단법인 제주해녀문화협회가 2년여의 준비 끝에 선보인 전시 '양종훈_제주가문해녀'가 지난 11월 30일 제주시 델문도 뮤지엄에서 개막한 것이다. 전시는 2026년 제주 해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을 앞두고, 제주 사회가 '해녀 기록의 새로운 방법'을 논의하는 중요한 출발점이자 사건으로 평가된다.
제주 해녀는 근대 산업화 이전부터 가계를 지키는 실질적 생계 주체였다. 바다에서의 노동은 개인의 직업을 넘어, 어머니에서 딸·손녀로 이어지는 세대의 서사, 그리고 제주 공동체가 유지되어온 윤리적 질서를 구성해왔다.
양종훈 사진가는 이러한 특성을 '가문의 계보'라는 틀로 다시 조명한다. 그는 단순한 해녀 초상 작업을 넘어, 같은 바다를 공유해 온 집안들의 혈연·혼인·세대·전승 구조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 방식은 기존의 개인 중심 해녀 연구나 문화재 기록 방식과는 다른 시도를 보여준다.
"해녀는 직업군을 넘어 한 가문의 생명력입니다. 그 생명력은 결혼 관계, 모녀 관계, 사돈 관계까지 얽혀 하나의 공동체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양종훈 사진가의 이 말은 이번 작업의 방향성을 가장 정확히 설명한다.
그가 촬영한 사진에는 세월의 바람을 견딘 주름, 물질을 나누던 손의 촉감, 그리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체온의 흐름이 그대로 담겨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카메라 앞에서 장식 없이 정면을 응시하거나, 혹은 자신이 물질을 배운 어머니·며느리·딸과 나란히 선 채 ‘가문을 이룬 바다’의 무게를 침착하게 보여준다.
전시에는 총 12여 가문이 참여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가족 관계의 다양성과 그 관계들이 실제로 바다의 노동을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은 바다에서 20년 넘게 물질을 이어온 진명자–노진영, 이춘옥–김보림 해녀는 "바다는 관계를 다지는 훈련장"이라는 말의 의미를 증명한다.
모녀 해녀인 양순보–김현정, 손춘숙–고명효 가문은 "물질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라는 해녀 문화의 전승 방식을 드러낸다.
자매 해녀 한순일–강순녀는 어린 시절부터 '같은 파도'를 견뎌온 관계가 어떤 연대감을 만드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시누이와 올케, 사돈 관계의 해녀 가문도 존재한다. 양순아–고청자, 김영자–문숙녀, 그리고 김공자–윤숙녀–김양순 가문은 혈연이 아닌 혼인 관계로 엮인 가족들이 같은 바다를 지키며 공동체를 만들어 온 제주만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처럼 '가문 단위 해녀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해녀의 삶은 개인의 생애가 아니라 한 집안 전체의 역사적 흐름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는 다른 지역 해양 노동문화에서는 보기 힘든 제주 특유의 생태·문화 구조다.

전시 개막식에는 오영훈 제주도지사, 김광수 제주도교육감, 그리고 이상봉 제주도의회 의장이 참석했다. 세 사람 모두가 공통적으로 강조한 메시지는 "해녀 기록의 체계화"였다. 오영훈 지사는 "해녀는 제주가 지켜온 가장 오래된 공동체 문화입니다. 이번 가문기록 방식은 해녀 보전 체계를 확장시키는 중요한 시도입니다."라고 말했다.


김광수 교육감은 "해녀 정신은 학생들에게도 교육적 가치가 큽니다. 기록 기반 아카이브를 교육 현장에서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하겠습니다." 라고 밝혔으며, 이상봉 도의회 의장은 "정확한 기록은 문화자원의 품격을 결정합니다. 도의회도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공식 석상에서 '해녀 기록 체계화'가 이렇게 강하게 언급된 것은 이례적이다. 이는 이번 전시가 단순한 예술 행사가 아닌 지역 문화정책과 직결된 전환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제주해녀문화협회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제주가문해녀 등록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향후 1~2년간 가문별 생애기록, 사진 및 영상, 유품 데이터, 구술 조사 등을 모아 디지털·실물 아카이브를 구축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2026년 유네스코 등재 10주년에는 가문 단위의 해녀 기록집, 사진집, 구술 아카이브를 함께 선보이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양종훈 이사장은 "지금이 기록을 시작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해녀 평균 연령이 70대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문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수집하려면 속도가 필요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기록의 시간'은 이미 빠르게 흐르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커다란 인화지에 담긴 정면 초상들이다. 사진의 배경은 단순하고, 가문 구성원들은 장식 없이 서 있다. 민낯의 얼굴과 해녀복, 그리고 담담한 눈빛만이 화면을 채운다. 이 침묵의 사진들은 관람객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해녀의 삶을 단순히 '신비로운 문화'로 소비하던 시선에서 벗어나, 그들의 생애와 가문이 겪어온 세월을 읽어내길 요청한다.
어떤 사진에서는 고령의 해녀가 곁에 선 손녀의 손을 꼭 잡고 있다. 또 어떤 사진에서는 오랜 시간 물질을 함께해 온 시누이와 올케가 정면을 응시하며 묵직한 연대를 보여준다. 이 모든 장면은 말보다 강하게, 해녀의 삶이 '개인의 신체 노동'이 아니라 ‘세대를 지켜낸 공동체의 역사’였음을 드러낸다.
해녀는 바다 시간을 산다. 날씨와 조류, 바람과 파도는 그들의 하루를 결정하고 그 하루들이 쌓여 한 생을 만든다. 그리고 그 생은 또 다른 세대로 이어진다. 어머니가 잠수복을 벗을 때, 딸은 그 어깨의 짐을 이어받고, 며느리는 또 다른 가족의 일부가 되어 바다에 선다. 그들은 같은 조류를 읽고, 같은 위험을 알고, 같은 삶의 방식을 이어받는다. 이 '시간의 연속성'이 바로 이번 전시가 기록하려 한 가문해녀의 본질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시가 제주 해녀 문화의 '서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지금까지의 해녀 연구가 주로 직업적·민속학적 관점이었다면, 이제는 가계사·사회사·젠더사·지역사를 아우르는 다른 유형의 접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사진 기록은 향후 교육 프로그램, 연구 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그리고 문화유산 보전 정책의 기초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 제주해녀문화협회는 "가문해녀 기록 사업은 콘텐츠 사업이나 일회성 전시가 아니라 제주 전체가 함께 구축해야 하는 장기 문화 프로젝트"라고 강조한다.
'제주가문해녀'는 제주 해녀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전시다. 그들의 삶은 신비하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대물림된 노동, 생계의 무게, 가족의 연대, 공동체의 책임이 모두 그들의 일상 속에 깊게 새겨져 있다.
사진 속 해녀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제주라는 섬의 역사 전체를 말한다. 가문해녀 기록 사업이 앞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지, 그리고 이 움직임이 제주 문화의 다음 미래를 어떻게 열어갈지 이제 많은 이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