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서울 강남의 갤러리나우(대표 이순심)가 개관 20주년을 맞아 한국미술의 깊은 뿌리를 정면으로 꺼내 든다. 오는 4월 2일부터 30일까지 열리는 기념전 'Heritage: Time Inherited(유산 : 이어받은 시간)'은 단순한 축하전이 아니다. 한국 미술계에서 1대, 2대, 3대에 걸쳐 예술적 가치와 작가 정신을 이어온 가족 작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예술은 어떻게 세대를 넘어 살아남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대형 기획전이다.
이번 전시가 주목받는 이유는 참여 작가군의 무게감 때문이다. 박수근–박성남–박진흥, 오지호–오승우·오승윤–오병욱·오병재, 천경자–수미타김, 허건(남농)–허진, 김병종–김지훈·김지용, 김세중–김범·유현미, 하인두·류민자–하태임, 허영만–허보리 등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굵직한 줄기를 형성해온 예술가 가족 13개 계보가 참여한다. 회화와 조각, 한국화, 사진, 만화, 뉴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장르 또한 넓다. 말 그대로 한국미술의 ‘가계도’가 한 공간에 펼쳐지는 셈이다.
이 전시의 핵심은 유명 작가의 후손을 소개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부모 세대가 지켜낸 예술의 태도와 철학이 자녀 세대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어디서 닮고 또 어디서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거장의 이름은 다음 세대에게 축복이면서도 때로는 넘어서야 할 벽이 된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긴장과 돌파, 계승과 변형의 과정을 통해 예술의 진짜 유산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가장 상징적인 축은 박수근 가문이다. 평생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화폭에 새긴 박수근의 예술은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정신적 원형 중 하나다. 그 뒤를 잇는 박성남은 부친의 세계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빛과 균형의 미학으로 현대적으로 풀어냈고, 손자 박진흥 역시 그 흐름을 동시대 조형 언어로 확장한다. 한 가문 안에서 예술은 복제가 아니라 대화와 변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이 계보는 선명하게 보여준다.
오지호 가문은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압도적 축이다. 한국적 인상주의의 선구자 오지호, 구상회화의 대가 오승우, 오방색의 화가 오승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오병욱·오병재까지. 이 가족의 이름만 따라가도 한국 근현대 회화사의 흐름이 읽힌다. 하나의 가문 안에서 서로 다른 형식과 감각, 시대성이 어떻게 공존하고 충돌하며 확장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밀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천경자–수미타김, 허건–허진, 하인두·류민자–하태임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유산'이라는 말의 폭을 더욱 넓힌다. 천경자의 강렬한 서사성과 독보적 여성성, 운림산방 계보로 이어지는 남농 허건과 허진의 전통과 현대의 교차, 불교적 추상세계를 펼친 하인두와 류민자의 예술적 유산이 하태임의 색채 감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은, 예술의 계승이 단지 닮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웅변한다. 물려받은 것은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고, 재현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언어다.
이번 전시는 특히 '순수미술'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김한용–김대수 부자는 한국 사진사의 흐름을 두 세대에 걸쳐 보여주고, 허영만–허보리는 만화와 회화라는 장르의 경계를 넘어 예술적 DNA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증명한다. '식객', '타짜', '날아라 슈퍼보드'로 한국 대중문화를 바꾼 허영만과, 회화로 자신만의 감수성을 구축한 허보리의 만남은 이번 전시가 가진 확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갤러리나우가 개관 20주년에 이 전시를 택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지난 2006년 4월 5일 문을 연 갤러리나우는 지난 20년간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소개하며 예술 현장의 변화를 가까이서 기록해온 공간이다. 그 20년의 시간 끝에서 갤러리가 꺼내든 화두가 '유산'과 '계승'이라는 점은, 결국 예술의 미래 역시 과거의 축적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새로움은 완전히 무(無)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치열하게 지켜온 정신,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남긴 질문,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자기 언어로 살아내는 창작의 과정이 있을 때 비로소 미래의 예술도 가능해진다.
한편 이순심 갤러리나우 대표는 "20주년을 맞은 지금, '맥을 잇는다는 것'의 가치와 의미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다"며 "이번 전시는 세대를 넘어 예술적 가치와 작가 정신을 지켜온 분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 마련한 자리"라고 밝혔다. 이어 "한국미술의 정신적 뿌리와 오늘의 창조적 계승을 함께 바라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늘의 K-컬처가 세계를 움직이는 시대, 이제 질문은 더 근본적인 곳으로 향한다. 한국적인 감수성은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이 한국미술의 DNA를 만들었는가. 'Heritage: Time Inherited'는 그 질문에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답한다. 거장의 이름 뒤에 가려졌던 또 다른 세대의 분투, 가족이라는 가장 사적인 관계 안에서 이어져 온 예술의 긴장과 사랑, 그리고 닮음과 차이를 한 전시 안에 응축해낸 것이다.
결국 이번 전시는 '과거를 기리는 전시'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이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다음 세대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세대를 건너 이어진 붓끝과 시선, 고뇌와 태도가 한 공간에 모이는 순간, 관람객은 작품을 넘어 한국미술 자체가 걸어온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갤러리나우의 20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가 단순한 회고를 넘어 강한 울림을 남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봄,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펼쳐질 이 전시는 묻는다. 예술은 무엇을 남기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유산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Heritage: Time Inherited'는 그 질문 앞에서 한국미술의 가장 깊은 맥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드러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