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 페로탕 서울은 미국 작가 다니엘 아샴(b.1980)의 개인전 '기억의 건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2017년 페로탕 서울에서 열린 국내 첫 개인전과 2024년 롯데뮤지엄에서의 대규모 회고전에 이어 페로탕 서울이 선보이는 작가의 두번째 전시이다.
'기억의 건축'은 다니엘 아샴의 미술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독창적인 개념인 '상상의 고고학(Fictional Archaeology)'을 바탕으로 시간과 물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탐구한다.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형상과 현대 문명의 오브제가 공존하는 그의 작업은, 마치 미래의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물처럼 다가오며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층위를 시각화한다.
회화, 드로잉,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조형 세계를 선보여온 아샴의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은 세계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시각적 고고학의 가능성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Amalgamated Venus of Arles'(2023)은 아샴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수년간의 레지던시를 통해 제작한 작품으로, 이 기간 동안 그는 박물관의 석고상 컬렉션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석고상들은 고대 조각을 1:1 비율로 재현한 복제물로, 교육용으로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에는 국가 권위를 상징하는 오브제로 식민지에 배치되기도 했다.
원작은 기원전 1세기 그리스에서 제작된 테스피아이의 아프로디테상으로, 17세기 프랑스 아를에서 발굴되었다. 아샴은 루브르의 석고 원형을 바탕으로 실물 크기 복제본을 제작하며, 고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재료들을 결합해 현재 기술적 한계마저 시험하는 혼성 조형을 선보인다.
작가는 이 조각을 입체적인 콜라주처럼 고광택 스테인리스 스틸, 녹이슨 것처럼 산화 처리된 청동이나 마감, 따뜻한 색감의 연마된 청동 등 서로 대조되는 세 가지 재료로 구성했다. 이 재료들은 지중해에서 건져 올린 고대 유물의 질감과 현대적 광택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세 재료는 정밀하면서도,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결합되어 정면에서 볼 때 하나의 유기적 형태로 보이지만, 관람자가 조각 주위를 맴돌수록 시각적 분열이 발생한다. 이와 유사한 효과는 'Amalgamized Crouching Venus'(2022)에서도 나타나며, 산화 표면 처리된 청동과 차갑고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스틸이라는 두 이질적 재료가 충돌하며 독특한 조형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아샴은 이번 전시에서 새로운 조각 연작인 캐스트샌드(주조 방식으로 제작된 모래 조각) 흉상들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이 작품들은 역사적 전례를 참조하면서도 동시대적 사고와 디지털 시대의 제작 기술을보여주는 요소들을 도입한다.
작가는 전시장에 함께 전시된 핸드 드로잉을 바탕으로 디지털 렌더링과 3차원 몰드를 개발했고, 일부는 컴퓨터를 활용한 3D 프린팅으로 제작했다. 완성된 작품들은 고전 조각상의 우아함을 암시하는 동시에 르네 마그리트와 M.C. 에셔에게 영감을 받은 인식의 퍼즐로 전개된다.
혼란스럽게 스케일을 변화시키는 건축적 디테일이 인간의 형상을 도발적으로 뚫고 지나가며, 이는 세밀한 관찰을 유도한다. 이러한 캐스트샌드 작품들은 잠재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향후 수년간 작가 작업의 주요 탐구 영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흉상들은 2025년에 제작된 새로운 회화 및 드로잉 연작 속에서 또 다른 생명과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번 연작은 작가에게 새로운 탐구의 지평을 여는 작업으로, 차가운 단색 톤으로 구성된 화면 속에서 거대한 조각상의 머리가 정글, 숲, 폐허 등지에 떠오르듯 등장한다.
그 풍경은 마치 고고학적 발굴 현장처럼, 고독한 탐험가나 소수의 인물 군상이 마주친 순간을 포착한다. 여러 작품에서 한 인물이 뒷모습 실루엣으로 등장해 거대한 유적을 응시하고 있으며, 관람자는 그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 동일한 경외의 순간을 체험해보도록 초대받는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아샴 특유의 방식대로 예술사적 선례를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다. 19세기 초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낭만주의 회화 속 인물을 떠올리게 하거나, 19세기 후반 알버트 비어슈타트와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의 이국적이고 광대한 풍경화와도 맞닿아 있다.
동시에, 이국의 고대 유적을 우연히 발견하는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영화 속 탐험가의 이미지 역시 강하게 환기된다. 이는 현대성과 고대성을 교차시키는 아샴의 기존 작업들과 긴밀히 연결된다. 작가의 모든 작업이 그러하듯,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회화와 드로잉 역시 디테일을 음미하게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회화와 조각, 드로잉, 영화, 패션, 건축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현대미술가 다니엘 아샴은 1980년 미국 클리블랜드 출생으로, 뉴욕 쿠퍼 유니언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니엘 아샴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인 ‘상상의 고고학(the fictional archeology)’은 우리의 현재도 먼 미래에는 결국 과거가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카메라, 마이크, 카세트 플레이어, 공중전화 같은 물건을 석고로 만들고, 모래와 화산재 같은 지질학적 재료를 활용해 이들을 방금 발굴된 것처럼 연출해 현재를 과거화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선보였다.
낭만주의와 팝아트 사이에 자리한 섬뜩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아샴의 세계관 속에서 현재와 미래, 과거는 은유적으로 충돌하며, 작가는 특정한 상징과 표현의 무시대성을 문화 전반에 걸쳐 실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