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설탕, 레진으로 다시 묻는 회화의 본질'... 마르친 야누시, 서울 첫 개인전 'Unweaving the Rainbow' 개최

  • 등록 2026.04.09 16: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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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지 마이크 서울, 마르친 야누시 서울 첫 개인전 선보여
마르친 야누시, 흙과 설탕으로 '무지개'를 해체하다

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서울 청담동의 한 전시장 안, 화면은 더 이상 단순한 ‘그림’의 표면으로 머물지 않는다. 흙은 부풀어 오르며 형상이 되고, 설탕은 결정으로 굳어 흘러내리며, 레진은 투명한 막처럼 표면 위에 얇게 고인다. 눈앞의 것은 회화이면서 동시에 지질학적 퇴적이고, 생물학적 흔적이며, 감각의 사건이다. 폴란드 출신 작가 마르친 야누시(Marcin Janusz)의 서울 첫 개인전 'Unweaving the Rainbow'는 바로 이 지점, 즉 이미지와 물질, 감각과 분석, 생성과 소멸이 한 화면 안에서 서로를 밀어내고 다시 끌어당기는 자리를 정면으로 다룬다.

 

전시는 오는 4월 11일부터 오는 6월 5일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 레이지 마이크에서 열린다. 국내에서는 처음 열리는 개인전이지만, 이번 전시는 단순한 ‘해외 신진 작가 소개’의 차원을 넘는다. 야누시가 오랫동안 구축해온 조형 언어와 문제의식을 비교적 밀도 높게 보여주는 자리이자, 동시대 회화가 어디까지 물질적·감각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다시 묻게 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야누시의 이력은 다소 이채롭다. 그는 의학, 정확히는 응급구조학을 공부한 뒤 미술로 방향을 틀었다. 그 전환은 단순한 경력의 변경이라기보다, 인간의 몸과 생명, 손상과 회복, 생성과 붕괴의 구조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암시한다. 실제로 그의 작업에는 해부학적 관찰과 유기적 상상력, 생물학적 질서와 신화적 서사가 늘 동시에 스며 있다. 그의 화면은 논리와 환영이 분리되지 않은 채 공존하는 장소다.

 

전시 제목 'Unweaving the Rainbow'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시 '라미아'에서 가져왔다. 1820년 키츠는 뉴턴이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를 광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 시적 경이로움을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철학이 무지개를 풀어헤쳤다”는 그 유명한 탄식은 이후 오랫동안 과학적 분석과 미적·정서적 경이 사이의 긴장을 상징하는 문장이 되었다.

야누시는 이 오래된 논쟁을 다시 호출하지만,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다. 그의 회화는 ‘이해가 경이를 파괴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그 질문이 벌어지는 현장 자체를 화면 위에 물질로 구축한다. 흙과 설탕, 레진, 유화 물감이 충돌하고 굳고 흘러내리며 만들어내는 표면은, 분석과 감각이 서로를 상쇄하지 않고 오히려 더 첨예하게 드러내는 장이 된다. 말하자면 그는 키츠와 뉴턴의 논쟁을 철학적 명제로 재연하는 대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회화적 상태로 되살린다.

 

이때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단연 재료다. 야누시는 회화를 단순한 시각 재현의 장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작업에서 흙은 땅의 질감을 가져오는 소재가 아니라, 실제로 화면 위에서 균열과 압력, 응고와 침식을 만들어내는 능동적 존재다. 설탕은 단지 달콤함의 상징이나 장식적 재료가 아니라, 수분과 시간에 따라 결정화되며 변화하는 물질로 작동한다. 레진은 투명한 광택을 부여하는 마감재가 아니라, 내부의 공기와 기포, 봉인과 질식의 감각을 동시에 불러오는 표면의 층이다.

 

결국 그의 화면은 무언가를 ‘묘사’하기보다, 존재가 스스로 형성되고 변화하는 방식 자체를 수행한다. 그래서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이미지를 읽기 전에 먼저 물질의 상태를 감각하게 된다. 표면은 단순한 시각적 정보가 아니라, 하나의 시간적 기록으로 다가온다. 무엇이 마르고, 무엇이 흘렀고, 무엇이 굳었는지가 화면 전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The Giant Tearing the Rainbow Apart'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대형 직사각형 캔버스 속 풍경 위로, 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형상이 솟아오른다. 제목 그대로 그는 무지개를 찢어 가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단순한 파괴의 알레고리로 읽히지 않는다. 그 거인은 외부에서 침입한 존재가 아니라, 마치 풍경이 스스로 균열을 일으키며 내부로부터 빚어낸 형상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야누시의 회화는 단순히 상징을 구성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화면 속 존재들은 사람 같기도 하고 식물 같기도 하며, 태아 같기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하다. 몸과 사물, 생명과 토양, 신화와 생물학이 하나의 형상 안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뒤섞인다. 이는 어떤 명확한 이야기의 전달보다도, 형태가 아직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상태, 혹은 생성과 해체가 동시에 진행 중인 상태를 붙잡으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묘한 불안과 매혹이 동시에 흐른다. 화면은 차분한 흙빛과 연보라, 몽롱한 녹색과 주황빛 태양 같은 부드러운 색조로 구성되지만, 그 안의 형상들은 결코 안온하지 않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처럼 보이던 장면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안정한 표면과 뒤틀린 몸, 응고되는 물질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익숙함과 낯섦, 서정성과 불길함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야누시의 작업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최신의 조형 실험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회화의 가장 오래된 기원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회화는 합성 안료와 산업 재료를 기반으로 하는 매체로 받아들여지지만, 역사적으로 그림은 오랫동안 흙과 광물, 동물성 물질, 식물성 안료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 황토, 뼈, 청금석, 공작석, 굴 껍데기 같은 재료들이 오랜 시간 동안 색과 표면의 근원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누시가 흙과 설탕, 레진을 사용하는 방식은 회화의 전통을 벗어난 급진적 이탈이라기보다, 오히려 근대 이후 잊혀온 물질의 연속성을 다시 소환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의 화면은 ‘재료 실험’이라는 말로 쉽게 환원되기 어렵다. 그것은 회화가 애초에 자연과 지질학적 시간, 생명과 분해의 순환 안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울이라는 장소 역시 흥미로운 층위를 더한다. 한국 회화 전통 또한 광물과 흙, 식물성 안료를 바탕으로 구축되어 왔다는 점에서, 야누시의 물질성은 전혀 낯선 외래적 실험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구축하는 표면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회화 전통이 공유해온 어떤 오래된 감각을, 동시대적 언어로 우회해 다시 마주하게 한다.

 

전시는 대체로 세 개의 흐름으로 읽힌다. 먼저 대형 직사각형 캔버스들은 가장 강한 서사성을 띤다. 초원과 태양, 흐린 하늘, 그 위에 솟아오른 흙의 형상들은 민담과 우화, 혹은 종말 이후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 서사는 결코 닫혀 있지 않다.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분명히 말해주기보다, 화면은 관객이 그 불완전한 이야기의 틈을 더듬게 만든다.

 

반면 타원형 캔버스 작업들은 보다 내밀하고 조형적이다. 이 연작에서 흙은 단지 화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테두리이자 구조가 된다. 화면은 마치 하나의 구멍처럼, 혹은 땅속으로 열린 단면처럼 보인다. 이 작품들에서는 이야기보다 물질의 촉감, 이미지보다 표면의 압력이 더 크게 작동한다.

 

그리고 'Magic Flowers with Sugar Tears' 연작에서는 설탕이 전면에 등장한다. 결정화된 설탕은 꽃처럼 피어나면서도, 동시에 녹아내리거나 굳어가는 상태를 함께 드러낸다. 이 형상들은 식물학적 실재라기보다 민담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식물, 혹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은 유기체처럼 보인다. 이 연작은 전시 전체에서 가장 서정적이면서도 기묘한 층위를 형성한다.

작품의 규모와 형식이 달라질수록 재료가 수행하는 역할도 달라진다. 어떤 화면에서 흙은 이야기를 말하고, 어떤 화면에서 그것은 이미지를 둘러싸며, 또 어떤 화면에서는 설탕이 감정을 대신해 녹아내린다. 즉 야누시의 재료는 결코 고정된 상징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들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매번 다른 속도로 시간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야누시가 끝내 명확한 해석의 완결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알처럼 보이는 것, 태양처럼 보이는 것, 몸처럼 보이는 것, 뿌리처럼 보이는 것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이 무엇인지 단정하는 순간 화면은 다시 다른 방향으로 미끄러진다. 형상은 늘 아직-되기 전의 상태, 혹은 이미-변해버린 상태에 머문다.

 

이 때문에 그의 회화는 ‘무엇을 그렸는가’를 묻기보다,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고 변화하는가를 묻게 만든다. 그 질문은 곧 회화의 존재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회화는 여전히 이미지를 만드는 장르인가, 아니면 물질과 시간, 생명과 소멸이 충돌하는 하나의 사건인가. 야누시는 이 질문에 대해 설명 대신 표면으로 응답한다. 그 표면은 아름답지만 안정적이지 않고, 서정적이지만 결코 순진하지 않다.

 

그 점에서 'Unweaving the Rainbow'는 오늘날 회화가 다시 어디로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다. 회화를 평면적 이미지의 재현으로 환원하지 않고, 물질의 기억과 감각의 시간,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로 확장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앞에서 관객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굳고 갈라지고 흘러내리는 물질의 생애를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회화는 다시 한번 살아 있는 매체가 된다.

한편 전시 개막일인 4월 11일 오후 4시에는 작가가 직접 참여하는 아티스트 토크도 열린다. 박재용 모더레이터와 함께하는 이번 프로그램은 작품 표면 아래 잠긴 사유와 재료의 층위를 보다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형석 미술전문 기자 yonsei68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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