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서울 한남동의 전시공간 갤러리 몬트레아가 3월 5일부터 오는 31일까지 ADEL LEE(이다혜)와 이비주 작가의 2인전 'Dear Unsame'를 선보인다. 전시는 '같지 않음(Unsame)'을 부정하거나 극복해야 할 차이가 아닌, 오히려 다정하게 호명해야 할 존재 조건으로 바라본다. 닮지 않았기에 더 깊어질 수 있는 감각의 결, 그 미묘한 틈에서 피어나는 기억과 욕망의 풍경을 두 작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펼쳐 보인다.
이번 전시는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 어떻게 표현됩니까?" 이 물음은 곧 기억과 감각의 문제로 확장된다. 우리가 간직한 추억은 과연 고정된 과거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재구성되고 있는 살아 있는 운동인가.

ADEL LEE의 화면을 채우는 둥근 형상은 닫힌 눈 안쪽에서 비로소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과 닮아 있다. 작가는 하나의 기억을 고정된 이미지로 묶어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또 다른 기억을 낳고, 독립된 에너지를 지닌 원(圓)으로 증식하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점과 LED 빛은 단순한 장식적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인식 이전의 경계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는 감각의 잔광이다.
이 작업은 앙리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기억은 과거에 봉인된 채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살아난다. ADEL LEE는 선형적 시간관을 거부하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 빛과 색, 움직임과 여백을 배치한다.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말처럼 지각은 세계와 나 사이의 살아 있는 교차점이며, 작가의 화면은 바로 그 교차점 위에 놓인다.

그의 작품은 완결된 서사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해석의 여백을 남긴다. 관객은 화면 앞에서 멈춰 서고, 각자의 기억을 호출하며 서로 다른 감각의 결을 발견한다. 그렇게 작품은 작가의 것이면서 동시에 관객의 것이 된다.
이비주의 작업은 또 다른 결의 몰입을 보여준다. 그에게 화실은 오랫동안 안식처가 아닌 유폐의 공간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작업에만 매몰되어 살았던 시간'은 이번 전시의 중요한 정서적 배경이다. 캔버스 앞에서 밤낮을 지우고 덧칠하던 어느 날, 해질녘 하늘이 쏟아져 들어왔다. 재현 불가능한 빛의 순간은 작가에게 균열이자 전환점이 되었다.
이 경험은 베트남 연작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행운의 숫자, 스마일과 같은 시대적 욕망의 기표를 화면 속에 병치한다. 그것은 소비사회가 부여한 가벼운 상징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개인이 기대어온 소망의 표식이기도 하다. 상상해온 '이국'과 실제 마주한 '현장' 사이의 간극은, 빛과 함께 박제된 형상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특히 아크릴판이라는 투명한 필터는 과거와 현재를 중첩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모호하게 부풀려진 사물의 실루엣은 베껴온 이미지들로 채워졌던 시절의 빈곤한 풍요를 오늘의 욕망 위에 다시 겹쳐 놓는다. 찬란함과 공허가 동시에 반짝이는 화면은 동시대의 자화상에 가깝다.
두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몰입'을 통과해왔다. 한 사람은 기억의 증식을, 다른 한 사람은 결핍의 심연을 응시한다. 그러나 그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의외로 다정한 풍경이다. 전시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고요히 호흡하는 순간, 관객은 작품을 감상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작품 속 기억의 일부가 된다. 전시는 그렇게 ‘고독한 자들의 안식처(Loner’s Haven)’를 제안한다.
한편 'Dear Unsame'는 차이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닮지 않았기에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독한 몰입 끝에 남은 것은 고독이 아니라, 다정한 차이다. 그리고 그 차이야말로 우리가 끝내 지켜야 할 감각의 고유성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