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광기의 서사', 오페라판 '왕좌의 게임'... 서울시오페라단, 40년 만에 다시 올리는 나부코

  • 등록 2026.03.01 13:5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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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오페라단 1986년 한국 초연 이후 40년 만의 귀환
'운명의 체스판' 위에 펼쳐지는 거대한 합창과 권력의 드라마
베르디 예술 세계의 출발점이 된 기념비적 걸작
양준모, 서선영, 전승현 등 세계 정상급 성악가들이 완성하는 압도적 무대

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재)세종문화회관이 서울시오페라단의 야심작 나부코를 오는 4월 9일부터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선보인다. 1986년 국내 초연 이후 정확히 40년 만의 귀환이다. 당시 한국 오페라사에 굵직한 이정표를 세웠던 작품이 세월의 층위를 더해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점에서 이번 공연은 단순한 레퍼토리 재공연을 넘어 ‘역사적 복원’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

 

1842년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를 단숨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 반열에 올려놓은 출세작이다. 실패와 좌절을 겪던 젊은 작곡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재기했고, 이후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로 이어지는 황금기를 열었다. 그런 점에서 <나부코>는 베르디 음악 세계의 출발점이자, 그의 정치적·인문학적 문제의식이 본격화된 선언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부코>의 중심에는 개인 영웅이 아니라 ‘합창’이 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예루살렘 정복과 유대 민족의 포로 생활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권력자의 오만과 민족의 고통, 신앙과 자유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 서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히브리 민족의 집단적 목소리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널리 알려진 ‘가라, 상념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Va, pensiero, sull’ali dorate)’는 단순한 삽입곡을 넘어 오페라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합창 중 하나로 꼽힌다. 조국을 잃은 자들의 비애와 귀환에 대한 염원이 서정적으로 흐르는 이 선율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정서와 맞물리며 사실상 ‘제2의 국가’처럼 불렸다. 1901년 베르디의 장례식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수천 명이 이 곡을 합창했던 장면은 예술이 시대와 어떻게 공명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회자된다.

이번 공연에서는 위너오페라합창단에 60명 규모의 시민합창단이 더해진다. 전문 합창단과 시민의 목소리가 한 무대에서 어우러지는 장면은 작품이 지닌 ‘공동체적 울림’을 동시대적으로 확장하는 장치다. 합창이 단순한 배경이 아닌, 무대의 심장으로 기능하는 순간이 될 전망이다.

 

연출은 서울시오페라단 <리골레토>(2022), 창작오페라 <양철지붕>(2023)으로 주목받은 장서문이 맡았다. 그는 이번 무대를 ‘운명의 체스판’이라는 콘셉트로 풀어낸다. 왕과 제사장, 딸과 연인, 정복자와 포로가 거대한 체스판 위의 말처럼 움직이며 권력의 게임을 벌이는 구조다. 오페라판 ‘왕좌의 게임’을 연상시키는 이 설정은 고대의 이야기를 현대적 감각으로 환기한다.

 

바빌로니아 왕 나부코는 신의 자리를 넘보는 오만으로 인해 광기에 빠지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걷는다. 왕위를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아비가일레는 사랑과 권력을 동시에 움켜쥐려다 파멸에 이른다. 유대 민족의 지도자 자카리아는 신앙을 통해 공동체를 결집시키며 또 다른 권위의 축을 형성한다. 이 세 인물의 충돌은 단순한 고대사 재현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권력과 광기의 메커니즘을 비추는 거울로 읽힌다.

 

기원전 6세기라는 시간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현재형이다. 권력은 어디에서 정당성을 얻는가. 신의 이름을 빌린 정치적 폭력은 어떻게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가. 그리고 자유는 어떻게 회복되는가. 웅장한 합창과 폭발적인 아리아, 치밀한 앙상블은 이 질문들을 음악적 에너지로 전환하며 관객의 감각을 압도한다.

이번 무대에는 국내외에서 활약 중인 정상급 성악가들이 대거 참여한다. 나부코 역에는 뮌헨 ARD 국제콩쿠르 1위 및 청중상 수상 경력의 바리톤 양준모와 빈체로 국제콩쿠르 1위의 바리톤 최인식이 더블 캐스팅됐다. 강렬한 카리스마와 섬세한 심리 표현을 동시에 요구하는 이 배역에서 두 성악가의 해석이 어떻게 대비될지 기대를 모은다.

아비가일레 역은 차이콥스키 콩쿠르 1위의 소프라노 서선영과 베르디·비냐스 국제콩쿠르 1위 소프라노 최지은이 맡는다. 극한의 고음과 драм틱한 표현력을 요구하는 이 난역은 오페라 소프라노의 역량을 가늠하는 시험대다. 페네나 역에는 메조소프라노 김선정과 임은경, 이스마엘레 역에는 테너 이승묵과 윤정수가 출연한다. 자카리아 역은 독일 정부로부터 궁정가수(Kammersänger) 칭호를 받은 베이스 전승현과 임채준이 맡아 무게 중심을 잡는다.

지휘는 브장송 국제지휘콩쿠르 한국인 최초 수상자인 이든이 맡아 한경아르떼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이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 솔리스트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음향 구조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공간을 가득 채울 예정이다.

 

1986년 초연 당시 <나부코>는 국내 오페라 제작 역량을 가늠하는 상징적 작품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 한국 오페라는 양적·질적 성장을 거듭해왔다. 이번 재공연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그 성장의 궤적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편 서울시오페라단 박혜진 단장은 “한국 초연을 선보였던 작품을 4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리는 뜻깊은 순간”이라며 “웅장한 합창 속 공동체의 목소리가 오늘의 관객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권력과 광기의 서사, 그리고 해방과 자유의 노래. 40년 만에 다시 울려 퍼질 <나부코>의 합창은 과거의 기억을 넘어, 오늘의 시대를 향해 묵직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오형석 yonsei68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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